용세라

〈흘러가는 말〉, 2021.

애니메이션 스틸컷, 혼합 매체, 혼합 재료, 프로젝션 매핑, 컬러, 사운드, 가변크기, 3분, 하상욱(시), 재믹스(비디오), 파블라 자브란스카(사운드) 협업, ACC 커미션

용세라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2012년부터 베를린의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호르트에서 일했고, 콜렉티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부터는 호르트에서 만난 체코 출신 디자이너 파블라 자브란스카와 함께 ‘프라울’ 이라는 이름으로 작업하기도 한다. 나이키, 디 자이트, 한성자동차, 에이랜드,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을 위해 작업했고,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베를린 디자인 소셜 클럽』이 있다. 제6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2018-2019)에서, 2018 타이포잔치 사이사이에서는 작가로, 2019 타이포잔치 본전시에서는 큐레이터로 참여하였다.

<흘러가는 말>
흘러가는 말>은 위쪽에서 등장해 아래쪽까지 흘러내려 간다. 매일 변화해 가는 환경은 이미 내뱉어진 말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고, 때로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나의 주변은, 정확히 어제와 오늘이 일치하지는 않다. 지루한 중에도 소소하지만 새로운 사건들이 거듭 등장한다. 산책길의 한 그루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가 지나치던 나의 눈에 띄게 되는 것도 내 눈앞에 벌어진 오늘의 작은 이벤트 중 하나이다. 지금의 여름은 다음 계절인 가을로 가기 전 하루하루 카운트다운하며 지나가고, 올해의 여름과 똑같은 여름은 내년에도, 그리고 10년 후에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계절은 흘러가고, 지금의 자연도 변화를 거듭한다.
<흘러가는 말>의 그래픽들은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이 흘러가는 시간에 맞춰 흘러가는 자연을 표현한다. 원색과 그를 뒷받침하는 수많은 색들은 변화하는 모든 계절을 대변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과, 아침, 낮, 밤, 새벽의 시간과 꽃, 나무, 강, 산의 풍경을 표현한다. 자연의 역동하는 에너지를 표현하는 각기 다르게 생긴 형태들은, 꾸준히 흘러가거나, 조금씩 흘러가거나, 모여 있다가 흘러가거나, 차례로 흘러가는 등 그 움직임을 달리하며 지나간다. 하나의 만들어진 모양은 각자 다른 색과 형태를 지닌 여러 이미지들이 혼합되어 새로운 형태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래픽 요소는 또 다른 그래픽 요소를 만나 서로 조합된다. 그러다 보면 애초에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와 색 조합이 탄생하는데, 이는 예상치 못한 환경적 변화와 같다.
시인 하상욱의 시는, 우리가 평소 느꼈을 법한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생각들이지만 막상 적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을 시라는 형식을 빌려 가려운 곳을 긁어 주기에 우리의 격한 공감을 사는 것일 것이다.
<흘러가는 말>에 등장하는 하상욱의 시 다섯 편은 요즘을 사는 지쳐 있는 우리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작품은 바라보는 관람객들로 하여금 그들 각자의 생각들을 흘러가는 시 문구에 덧붙여 잠시 생각하기를 유도한다. 시의 글귀들을 ‘흘러가는 말’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계속해서 보는 이의 머릿속에 남아 머무르기보다, 보고 흘려보내길 바라기 때문이다.
요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경 써야 할 것들도, 기억해야 할 것들도 많다. 몸은 물론이고 머릿속의 여유조차 찾기 힘든 나날을 보내는 관람객들에게, 이 작품의 지나가는 문구들이 우리 곁을 한 번 스쳐가는 주변 환경의 찰나처럼 마음속으로 흘러 감흥 을 주고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이기를 바란다.
시와 그래픽은 작업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흘러갈 수 있도록, 비디오는 재믹스와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흘러가듯 유동적인 그래픽의 형태들은 시 문구들과 함께 움직이며 재믹스는 그것들의 움직임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공간을 아우르는 곡선들이 여러 군데 등장하는데 이는 비디오에 등장하는 많은 요소들을 한데 묶어 주는 효과를 주기 위함이다.
프라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파블라 자브란스카는 사운드를 맡았다. 프라울은 프라하와 서울의 합성어로, 프라하 출신인 파블라 자브란스카와 서울 출신인 나, 용세라를 의미한다. 두 사람은 베를린의 디자인 스튜디오 호르트에서 만나 옆 자리에 앉게 된 인연으로 2013년 프로젝트 팀을 결성했고, 지금까지 같이 또 따로 활동한다. 프라울은 현실의 사물을 비현실적인 표현 방법으로 그려 내는 데에 흥미가 있으며, 이에 걸맞는 사운드를 결합시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구체화시킨다. 서울도 프라하도 아닌, 그 두 도시의 영향을 받고 자란 두 명의 아이덴티티가 합쳐져 형성된 새로운 분위기를 이번 작업의 사운드에서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