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원

〈풍경을 빌리는 방법〉, 2021.

영상 스틸컷, 오디오 비디오 설치, 혼합 재료, 프로젝션 매핑, 컬러, 사운드, 4분 26초, ACC 커미션

권혜원은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이 배어 있는 장소들을 리서치한 후, 이것을 영상으로 서사화한다. 작가는 영상을, 서사 구조를 구축하는 현장으로 생각하고 리서치 과정에서 발견된 요소들을 통해 공간적이고 조형적인 서사 구조를 만들어 낸다. 런던 대학교(UCL) 슬레이드 미술 대학에서 파인 아트–미디어 전공으로 석사 과정을 졸업 후, 2011년 영국 블룸버그 뉴 컨템퍼러리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2017)와 서울시립 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2016)의 입주 작가로 활동했다. 최근 참여한 전시로는 《웅얼거리고 일렁거리는》(백남준아트센터, 용인, 2018), 《신여성 도착하다》(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서울, 2018) 등이 있다. 부산현대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고, 2019년에는 제19회 송은미술대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지난 5월 광주에 도착해 이기모 큐레이터와 함께 전시의 현장이 될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 공간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문화창조원과 예술극장 건물 사이에 있는 평범한 공간이었다. 외진 출입구 중 하나였고, 주요 건물들로 내려가기 위한 통로이자 화장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중앙 광장이나 인상적인 건물들에 비하면, 그저 지나다니는 통로이자 출입구일 뿐 특별한 인상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특별하지 않음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것을 생각하거나 떠올리기에 좋은 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스크린이 될 곳은 문화창조원의 외벽과 그 아래 경사로로 이어진 긴 소방 도로 바닥이었다. 긴 길 위에 18개의 프로젝터가 이어져, 어떤 이미지가 흐르게 될 터였다. 25.875:1이라는 인상적인 화면 비율의 스크린 위를 걸었다. “감각정원: 밤이 내리면, 빛이 오르고”라는 시적인 전시 제목을 마음에 떠올리며, 문득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조경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나무 몇 개, 화초 몇 개를 심어 놓은 것이 아니라, 마치 숲의 한 조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무성한 식물들의 섬을 다시 보았다. 예술극장의 옥상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년 전 가을, 도시역사학자 최종현과 함께 경복궁을 답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이어졌지만, 경회루가 서 있는 연못가에서 연못의 수면 위에 비친 북악산을 쳐다보며 들었던 ‘차경(借景)’의 개념은 오랫동안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중국 명나라 계성(計成)이 저술한 책 『원야(園冶)』(1634) 등 다양한 문헌에 나타나는 차경은 풍경을 빌려 쓰는 것, 즉 집 밖의 풍경을 집 안으로 직접 끌어오지 않고, 담벼락 안에서도 이를 조망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자연 경관에 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경회루 연못의 수면에서 일렁거리던 북악산 봉우리를 떠올리며, 프로젝터의 빛이 투사될 건물 벽면과 길 위에 ‘어떤 풍경을 빌려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연못의 수면 위에 반사된 먼 곳의 풍경을 보는 것과 영상을 만드는 일은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카메라로 먼 곳의 이미지들을 포착해서 관람자의 눈앞에 다시 펼쳐 놓는 것은 차경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조경 디자이너였던 정영선에 관한 리서치를 진행하던 중, “경치는 일부러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조경’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정영선의 지난 인터뷰 글을 읽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연결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는 정원을 만드는 일을 땅, 사람, 자연, 미래를 서로 연결하는 일로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여러 존재와 공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일은 먼 곳의 풍경을 지금 이곳과 연결하는 차경과도 유사한 점이 있었다.
나는 단지 스크린이 될 벽과 바닥뿐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를 작품의 공간으로 생각했다. 전시 공간 안에는 배롱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데크, 멀리 예술극장 위의 대나무 숲, 그리고 넝쿨 식물들로 뒤덮인 거대한 원형의 타워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 이곳에 부족해 보이는 ‘물’의 풍경을 빌려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100미터가 넘는 긴 스크린에 어울리는 풍경이기도 했다.
광주라는 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는 광주천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광주천에 대한 여러 문헌 자료를 찾고 읽는 일과 함께 24.4킬로미터의 광주천을 걷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무등산 장불재 아래 800미터 지점에 위치한 발원지 샘골이었고, 영산강 합류 지점까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빌려 오려는 풍경에 무등산 또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광주천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 걸으며, 강 자체가 하 나의 로드 무비 같다고 생각했다. 광주천은 무등산 계곡 속의 발원지부터, 수원지, 도시 근교, 복개상가, 공항 관제권의 영산강 합류 지점까지 다양한 풍경이 이어졌고, 이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새, 곤충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걸으면서 기록하며 이어진 강의 이미지는, 영상 편집 과정에서 보아 왔던 필름 스트립(하나의 이어진 공간 안에 다양한 시간들이 포착되어 있는)의 형태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이 영상 작품을 만드는 일 역시, 여러 존재와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일이자 정원 만들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풍경을 빌리는 방법>의 시작이었다.